나에게 선물한 게으름의 하루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옌스가 지난 6개월동안 들어온 MMPI 과정의 마지막 주 첫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부터 3일 동안 다른 도시에 있는 연수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과제도 발표하고, 최종 시험도 본다. 덴마크에선 Rounded birthday(Afrundet fødselsdag)라고 0으로 끝나는 생일에나 파티와 함께 크게 기념하고, 나머지 생일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끼리나 작은 선물을 주거나 말거나 한다. 오늘은 만 35세가 되는 날. 사실 생일은 쇠털같이 많은 날 중 하루일 뿐이고, 매년 한번씩 돌아오는 날이다. 꼭 특별한 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기념해서 나쁠 것도 없는 그런 날.

아침식사으로 왠지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어야 할 것 같아 냄비를 꺼내려 했지만, 혼자 먹을 미역국을 끓이기도 귀찮거니와 이상하게 여기 쇠고기로 끓이는 미역국은 그냥 그렇기에 애꿎은 찬장문만 열었다 닫았다. 매일 먹는 오트밀을 생일날에도 먹기엔 좀 심심하지 않나 싶어, 어느 날 점심메뉴로 먹어볼까 싶어 샀던 훈제숭어를 꺼내들었다. 아침 식사론 비린 메뉴였지만, 왠지 단백질 식사는 특별하고 화려한 느낌. 크래커와 함께 곁들여먹은 숭어는 예상대로 비렸다. 그래도 좋아하는 크래커가 매진되어 할수없이 새로 시도해본 크래커가 더 맛있어서 그 맛에 먹었다.

입가심하려고 새로 사온 리들(Lidl)판 염가 룽고커피캡슐로 커피를 내려보니, 맛이 꽤나 괜찮다. 개당 250원 꼴이니, 한잔 마시면 500원이다. 실업자가 비싼 캡슐을 소비해야 쓰겠나 해서 정품 네스프레소를 버리고 짝퉁 캡슐을 사본 건데, 크게 불평할 일은 없겠다.

크래커를 우물거리며, 커피로 입가심을 하면서 어제 쓰다만 블로그 포스트를 마무리했다. 집에 혼자 있는 날의 장점은 머리가 헝클어져 있어도, 혹은 떡져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애벌레가 허물 벗듯이 침대에서 내가 나온 흔적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게 일어나 방은 어수선하고, 나도 지저분하지만, 그래도 좋다.

페이스북에 많인 친구와 지인의 축하 메세지가 온다. 행복한 하루되라거나, 옌스와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라는 인사들이 많이 보인다. 아쉽게도 옌스와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만, 행복한 하루는 보낼 수 있다. 뭘 할까? 내가 좋아하는 갤러리를 가보려고 하니, 아뿔싸. 오늘은 월요일, 휴관일이다. 아침에 쨍하던 해도 어디론가 들어가 사라져서 날씨도 꾸물꾸물하니 밖으로 나갈 의지는 쉽사리 꺾여버렸다.

오늘은 계량경제 공부하는 날인데, 그걸 해야되나 생각하다가, 나에게 주는 선물로 좋은 게 생각났다. 죄책감 없이 게으름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 한끼 맛있는 것을 요리해 나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선물을 정했다. 저녁마다 얼굴을 보면서든, 떨어져 있는 날엔 전화로든 그날 무엇을 했는지 서로 자세히 이야기하는데, 게으름을 피운 날엔 그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떄로는 열심히 해야한다는 채찍질을 당하기도 하기 때문에 게으름은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보내기로 결정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게으름을 게으름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는 훌륭한 선물인 것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옌스는 여름엔 꼭 창문을 열고 자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창문을 열고 자고 있는데, 그리하여 최근에 알게된 사실은 새들은 생물학적 시계가 아닌 일조량의 시계에 따라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즘 세시 반이면 동이 트기 시작해 네시 반에 일출이 있는데, 부지런한 새들은 세시반부터 지저귀기 시작한다. 고용한 새벽에 들리는 울려퍼지는 새소리는 아름답다. 까마귀면 그닥 아름답게 들리지 않겠지만, 다행히 이름 모를 새소리가 귀에 즐거운 소리라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새벽에는 꿈에서 새가 지저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깨고 보니 새벽 세시 반. 부지런도 하다.

그 다음부터는 깊게 잠이 오지 않아 깜빡깜빡 졸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뒤척거리면서 잠시 눈을 뜬 옌스와 눈이 마주쳤다. Tillykke med din fødselsdag, skat. 생일 축하해 내 사랑. 아침 잠결에 나도 기억못한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준다. 그 아침을 여는 한마디와 배경음악처럼 깔린 새소리. 오붓한 저녁식사도 좋지만, 가장 행복한 것은 이런 소소한 기쁨이다.

저녁 9시. 게으름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하루를 이렇게 보내면 원래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오늘은 그런게 전혀 없어서 특별하다. 이제 내일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

엄마, 아빠.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실업자의 게으른 하루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 하루를 꾸리는 것이 전적으로 나의 몫이 된다.

아침에 눈을 비비적 거리면서 옌스에게 출근 인사를 하는 것이 시작이다. 의욕에 찬 날이면 미리 일어나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정갈히 입는 정도의 예의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면 잠옷 바람으로 산발머리를 하고 카페인 공급차 커피한잔 내리는 게 다이다.

항상 짧은 번아웃 주기를 갖고 있는 나에게는 이러한 패턴이 자주 반복된다. 그래도 내리막길로 들어섰을 떄 나를 과하게 힐난하며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렇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면에서 적은 죄책감과 함께 오르막길로 다시 돌아서곤 한다.

요 며칠간은 내리막길이다. 내 안의 나을 너무 비난하지 않고 잘 달래서 오르막길로 올라가야 한다.

내리막길에 들어서면 주변 정리를 하기 싫어지고, 미루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사람과의 연락에서도 좋은 답을 하기 위해 3분이면 답을 할 일도 3일이나 심하면 일주일을 미루게 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 싶어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놓아버리는 것이 완벽주의자의 성향인데, 딱 내 이야기다.

오늘은 특히나 밤에 잠을 잘 못잔 탓에 커피 한잔에도 잠이 영 깨지 않아, 침대로 돌아가 누워 잠을 잤다. 8시에 들어가서 10시 반에 다시 일어났으니… 그나마 이시간에 일어난 것은 배꼽시계가 울렸기 때문이다.

요즘 영 입맛이 없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한숨쉬면서 닫는 게 일상이다. 뭐든 해먹으려면 해먹을 수 있지만, 내가 해먹고 싶은 것은 여기서 재료값이 비싸고, 특정 장소에 가서 재료를 사야 하기 때문에 선뜻 떠올랐을 때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 그래도 뭔가는 먹어야 하니… 하면서 떠오른 것은 라면. 수출용 신라면은 별로 맵지가 않다. 달걀을 넣었더니 진라면 같이 되어버렸길래, 이번엔 달걀도 없겠다, 그냥 끓였다. 순간 떠오른 것이 캡사이신 소스. 한국에서 얼마전 특별히 조달해왔다. 아… 과유불급이라 하였던가. 속이 엄청 쓰리다. 국물은 그냥 하수구로 부어버렸다. 아까워라. 결국은 속까지 쓰리길래 옆에 굴러다니는 크래커를 한통 비웠다. 칼로리를 소비해야 하는데, 앉은 자리에서 정크 푸드를 두개나 위에 쑤셔넣었으니.

식기세척기라는 럭셔리는 사람의 게으름을 더 부추기는 아이템이다. 그래도 진정 부엌의 혁신자라고 할 수 있다. 엉망인 부엌도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하나씩 넣다보면, 금방 정리가 끝난다.

덴마크어 학원 가야 하는데, 숙제를 다 하지 못했다.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니, 인터넷 서핑을 수시로 하게 된다. 중간중간, 너 이러면 안돼!를 스스로에게 몇번이나 외쳐야 하는지 모른다. 멀티태스킹을 해야하는 회사생활이 오래되다보니, 뇌구조가 변했다보다. 멀티태스킹도 잘 못하지만 모노태스킹에 큰 장애가 생겼다. 빨리 학교생활을 해서, 공부에 쫓겨야만 할 것 같다. 간신히 스스로를 달래가며 숙제를 끝내서 잘 프린트 한다음 가방을 챙기고 수업에 뛰어갔다. 수업시간엔 집중이 잘 되고, 공부가 재미있는 거 보면, 대학원 복학 후 삶이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 오는 길에, 저녁 찬거리를 고민하다가 맥도널드에 들렀다. 오늘 하루는 정말 불량식품으로 점철되었다. 집에 와서 이것저것 잡스러운 글을 읽고, 상념에 잠기다보니 시간이 휙하고 흘러갔다.

이제 곧 자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