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게 별로 없는 덴마크 유치원?

한국을 다녀오면 유치원에서 하나에게 남은 시간은 보름도 채 남지 않는다. 방과후 학교로 넘어가 학교 입학까지 3개월의 시간을 보내는데, 여름 휴가 기간 3주를 제외하고 나면 2개월 정도 시간을 보낸 후 8월 초부터 0학년을 시작하게 된다. 왜 서구는 주로 가을에 학기를 시작할까 생각을 했는데, 아마 여름방학이 길고 연말연시 연휴기간방학, 겨울방학, 부활절 휴가기간, 가을방학 기간 등은 1~2주 정도로 짧게 쉬다 오는 것들이라 한 학년을 끊기에 애매한 기간이라 그런게 아닌가 싶다.

2023년 중에 만 6세가 되는 아이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 해에 0학년을 시작한다. 이보다 1년 먼저 일찍 시작하는 아이들도 있고 늦춰서 만 7세가 되어 시작하는 애들도 있다. 덴마크는 의무교육이 10년으로 정해져있는데, 이를 꼭 학교에서 해야하는 것은 아니고 가정에서 해도 무방하다. 즉 어디서 하든간에 0학년에 되는 시점부터 의무교육이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글을 배우고 기초적인 산수와 과학, 예술, 체육활동 등을 하는데, 기존에 유치원에서 놀이처럼 배우던 것이 책상에 앉아서 좀 더 학습처럼 배우는 형태를 띄게 된다.

아직까지 학교에 애를 보내지 않아서 학교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덴마크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뭘 하는지는 좀 빠삭해졌다. 한국인 부모 중에는 덴마크 어린이집/유치원보다 한국 어린이집/유치원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개인의 교육관과 취향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덴마크 기관이 내 교육관과 취향에 맞는다.

덴마크 기관에서는 0학년에 가기까지 앉아서 뭘 가르치지 않는다. 앉아서 뭘 하는 건 레고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뭔가를 오리고 붙이고 만들고, 밥 먹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안과 밖에서 몸을 써 놀고, 운동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특별한 스포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라고 하면 요가정도? 이 또한 아이들에게 체육 활동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시에 따라 조용히 움직이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신체에 일어나는 일에 집중을 하면서 조절기능을 향상하기 위해 시키는 거다. Mindfulness 시간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 시간에 뭐하냐고 물어보면 요가 매트 깔고 눕거나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에 초점을 맞추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거라고 한다. 그러다가 간혹 10-15분씩 파워냅을 하기도 하고.

그밖에 노는 건 정말 뛰어 노는 거다. 지금 유치원에는 실내 암벽이 없는데, 예전 유치원에는 앞에 두툼한 매트리스를 깐 실내 암벽이 있어서 이미 두돌 반 때부터 이 벽을 원숭이처러럼 타고 놀았다. 비가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에 한번은 꼭 밖에서 놀고, 비가 오는 날도 비가 그치면 나가서 논다. 그러면 옷이나 장화는 정말 진흙과 모래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어서 애를 데리고 올 때가 되면 그게 다 말라 붙어서 옷을 접으면 흙덩이가 부러져서 떨어져내린다. 그나마 말라있으면 다행이고, 그 진창 옷을 집으로 가져갈 때면 들고 가기도 정말이지 번거롭다. 자주 빨 수 있는 옷이 아니니까 집에 가서 말려 털어보내야 한다. 특별히 다칠만한 위험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들은 대부분의 활동에 대해서 큰 제재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다쳐오는 일도 종종 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몸을 쓰는 법을 배우고, 건강하게 큰다.

운동이 아닌 활동은 소근육 발달을 위한 그림그리기, perler (한국에서는 펄러비즈라고 하던데, 판에다가 플라스틱 비즈를 끼워서 모양을 만들고 다림질을 해 이것저것 만드는 것으로 덴마크 기업이 만든 것) 판에 끼워 만들기, 부활절, 할로윈, 크리스마스 등 시즌에 맞춰 실내 장식할 때 뭔가 오리고 붙이고 만드는 공작 같은 창의력 향상 활동이 한 축을 이룬다. 또 다른 축으로는 아침에 모여서 조회시간에 노래 부르는 시간. 운율과 음율을 맞춘 동요가 많고, 학교에 가서도 운율과 음율에 많은 비중을 둬서 교육이 이뤄지는데, 같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는게 조직내 소속감 등을 고양시켜준다고 해서 덴마크인들은 이를 교육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산수를 따로 배우지는 않는데, 뭔가 생활속에서 이런 저런 것을 배우는지, 2+2는 4, 4+4는 8, 8+8은 16, … 이런걸 나에게 와서 말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상 속에 엮어 산수도 배우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도 물론 빼 놓을 수 없다.

기타 공동체 생활을 위해 유치원에서 큰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 옷입고 벗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에 돕게 한다거나, 식사 당번을 정해서 배식을 돕게 한다. 또 일주일에 한번 씩 왕따 방지 교육을 해, 뭐가 괴롭히는 것인지, 그럴 땐 어떻게 해야하는지 해당 당사자와 주변인의 역할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배운다.

유치원에서 뭔가 다양한 수업을 하지는 않지만, 어른들이 만드는 놀이나 학습에 애들이 참가하는 형태가 아니라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놀이를 만들고 노는데 익숙하다.

다만 애들은 좀 꾀죄죄하다. 옷이 더러워지고 헤지고 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애를 데릴러 갈 때 보면 애들이 죄다 꾀죄죄하다. 머리도 엉망진창, 얼굴과 옷도 여기저기 더러워져있고. 좋은 옷은 살 필요가 없고, 유치뽕짝이든 뭐든 애들 취향에 맞춰 대충 저렴하고 튼튼한 옷을 사주면 된다. 괜히 좋은 옷 입고 가서 더러워지고 찢어지면 아깝기나 하지.

아침이면 15분 정도 침대에서 뒹굴며 잠을 깰 시간을 주고, 일어나서 옷 갈아입고, 머리도 자기가 빗고, 부엌에 내려가서 자기 먹을 아침식사 직접 챙겨다가 아빠랑 아침 식사 하고, 겉옷 챙겨입고, 도시락이랑 물통 가방에 챙겨 넣어 집을 나서고, 혼자 놀 땐 놀고, 도움을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하고 등등 하나의 인간으로서 역할을 다 한다. 도시락이야 내가 싸주지만, 그나마도 내 옆에서 간혹 거들때도 있고, 빨래랑 밥해주고, 책읽어주고 조금 놀아주고 여기저기 데려다주는 역할 때면 내가 하는 게 진짜 별로 없어졌다. 자기 주도성, 스스로를 돕는 자조능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능력, 자기가 필요한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 못하는 것도 연습하면 늘게 되어 있음을 알고 꾸준히 하는 것 등 물론 가정교육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유치원에서의 교육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시간이 흐르고 보면 한국에 있는 아이들이 여기에 있는 아이들보다 더 많이 배워 좋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그냥 애들이 즐겁게 놀고 어른의 과도한 통제 없이 적당한 상처도 입어가면서 보다 창의적으로 자신을 배우고 성장하고, 공동체 정신을 함양하면서 사회성 기르는 이곳이 나는 마음에 든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규칙을 잘 지키고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 더 초점을 두는 것도 마음에 들고. 결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키워내는 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것인데, 그 근간을 유치원에서 닦을 수 있는 것이 좋다. 내가 선행학습과 안맞았던 사람이라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시기의 적당한 자극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공부야 학교 가서 하면 된다 싶다.

주변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하여 개개인이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일이야 말로 정말 가르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유형의 것으로 보여주기 어렵지만 아이의 매일을 통해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덴마크 공교육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취학전 전환기 상담

반차를 내고 아이 유치원에 가서 취학전 전환기 상담을 하고 돌아왔다.

한국과 달리 덴마크에서는 0학년이라고 정규 과정 전 1년을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후 학교에서 보내게 한다. 0학년에서 보내는 시간은 시간의 양적 총량에 있어서 유치원에서와 다를 게 없지만 활동의 종류와 성격, 교사 1인당 배정되는 아이 인원수 등에서 차이가 꽤 난다. 덴마크는 보육원에서 유치원으로, 유치원에서 학교로의 전환 등에 있어서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지원한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인근 유치원을 몇차례 방문해서 아이들과 얼굴을 익히기도 하고, 반대로 아이들이 학교를 방문해 0학년의 생활을 간접 체험하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지 등을 미리 익힐 수 있게 도와준다. 유치원으로 올라갈때도 같이 올라가는 아이들이 훨씬 긴 기간동안 틈틈히 유치원을 방문하게 해 전환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불안함을 최대한 낮춰주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어려서 보육원에 다닐 때는 육아를 이렇게 하는 게 맞는건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나 등에 있어서 하원길에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많았고, 유치원에 처음 올라가서도 계속 이어진 통합 유치원이라 선생님들과도 관계가 깊어지니 대화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와 시작한 처음 유치원에서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다른 애들을 떼리고 소리지르는 아이들이 많아서 1년의 짧은 기간동안 하나가 너무 힘들어해서 이런 상황을 개선해보기 위해 상담을 할 일들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번 유치원에서는 내내 하나가 너무 잘 지내서 선생님과 가벼운 인사 정도 이외에는 크게 이야기를 할 일이 없었다. 중간 중간 잘 지내는지, 문제는 없는지 물어보기는 했어도 너무 잘 지낸다 하니 딱히 더 물어보기도 그랬고. 그런 연유로 이런 상담이 너무 오래간만이라 그간 하나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유독 궁금하고 살짝 긴장마저 되더라.

하나는 중간중간 짧게 들었던 피드백 그대로 너무 잘 지내고 있었다. 주변 상황을 잘 살피고, 민첩하고,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아이란다. 모든 발달 측면에서도 그 나이에 맞는 발달을 하고 있되 뛰어난 쪽에 속한다고 한다. 용감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에 두려움이 없고, 시도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적절히 한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들이 와서 활동을 하면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쭈뼛쭈뼛 위축되서 눈치만 보는 아이들도 있다면, 우선 당면한 과제에 바로 참여해서 질문을 해가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한다.

타인과 큰 갈등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없는데, 자기의 목소리도 낼 것은 내되 협상을 잘 하고 모두를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시키고, 양보할 때 양보하기 때문에 그렇다며, 삐져서 혼자 토라져 있는 형태로 갈등을 피하는 게 아니라 갈등 상황을 잘 해결한다고 한다. 그 점 참 마음이 놓이는 이야기였다. 살면서 수많은 갈등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줄 안다는 건 큰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규칙을 잘 이해해서 뭘 해야하고 하면 안되는지 잘 알아서 그를 잘 준수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누군가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안좋아지거나 위험하거나 등 하면 필요한 타이밍에 어른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자질쟁이 같은 식으로 하는 건 아니고 제지할 수 있는 건 제지하고 크게 위해가 되지 않으면 어른이 개입할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적당한 수준으로 도움을 요청한다니 내가 아는 하나가 맞다.

놀이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이 좋고 아이디어가 많은데 판타지 동물 이런식의 창의성은 아니라 현실성에 근간한 창의성을 보인다니 엄마 아빠의 드라이함이 반영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뭔가를 만들고 그리고 춤추고 몸을 써서 하는 활동에 특히 뛰어나다니까 그 점 많이 계발해주면 좋을 것 같다.

관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난데, 거기에 질문을 잘 던져서 언제 저런걸 알아차렸지? 정말 좋은 질문인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많단다. 그런 생각을 나만 하는게 아니었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뛰어나다고 한다. 어른이 하자고 하는 활동에 있어서 “나는 싫어” 라며 빠지는 것 없이 항상 적극적이고 밝게 참여해서 타인의 참여를 유발한다고 한다.

유치원에 두 반이 있는데 취학연령 아이들은 모아서 따로 큰아이 그룹을 일주일에 한두차례 운영하는데, 다른 반 아이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서 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있는 아이라고 한다. 본인이 사랑이 넘치는 아이라 어린 아이들도 잘 보살피는데, 하나가 있으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하나가 있음을 알게끔 그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학교 가서 너무 잘 적응할거라고 하는데 참 마음이 놓이더라.

이제 이틀이면 하나 생일이고, 삼개월이면 학교를 시작하니 얼마나 시간이 빨리 흐르는지 모르겠다. 사랑이 넘치는 우리 아이.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이더라. 애를 데릴러 가야지 이제.

아이를 통해 나도 다시 그 시절을 겪는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던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 기억들은 자주 떠올리던 기억이 아니면 잊혀지는 것이 많다. 내가 부모님에게 어떻게 어리광을 부렸는지, 어떤 감정을 겪었는지 등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잊혀진 어린 시절을 하나를 키우면서 다른 방식으로 다시 경험한다. 아이가 아닌 부모로서, 나라가 바뀌어 새로운 맥락에서.

하나는 신체적 접촉을 매우 좋아한다. 부모가 쓰다듬어주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자기 전 책을 다 읽고 나면 꼭 잠이 들때까지 몸을 쓰다듬어줘야 한다. 그런 연유로 만으로 거의 여섯살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한번도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하나를 재워준 적이 없다. 아이의 부드러운 뱃살을 쓰다듬는 그 따뜻한 감촉을 우리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또 길을 가다가 갑자기 “엄마, 안아주세요.”라던가, “엄마, 뽀뽀.”라면서 신체적 접촉을 원하는 때가 있다. 나는 어땠는가?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와 옌스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을 좋아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친구들 중 하나에게 작별 포옹을 하겠다고 안아줄때면 소극적으로 안겨줄 뿐이지 적극적으로 안아주는 건 정말 내키는 경우 아니면 애착을 느끼고자 하는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꽤나 드문일이더라.

책장을 새로이 사주고 디스코 램프랑 인형집, 전축 등을 그 위에 이쁘게 놔줬더니 자기 방이 큰 애 방같이 느껴졌던 거 같다. 그 다음부터는 저녁엔 방 정리를 제법해서 더이상 전쟁통같은 방에서 재워야 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때로는 같이 정리를 해야하기도 하지만, 정리하다가 딴짓하고 노는 것으로 새는 일이 줄어들면서 같이 정리하기도 수월해졌다.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 함께 정리를 하다가 머리카락 뭉텅이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싶어서 이게 뭐냐고 물었는데, 잘 모르겠단다. 음? 모른다고? 가위가 옆에 보이고, 가위로 싹둑 잘린 흔적이 보이는 머리카락인데? “내가 보기엔 네 머리카락 같은데, 아냐?”라고 재차 물으니, 씩 웃으면서 자기 머리를 어쩌다보니 자르게 되었다면서 죄송하단다. “네 머리카락이니까 미안할 일은 아닌데, 잘못해서 귀를 자를 수도 있고, 눈을 찌를 수도 있으니 머리카락은 엄마 없는데서 자르면 안돼. 그리고 다른 것보다 엄마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해야돼.”라고 말을 하자 “네.”라고 배시시 웃으면서 답을 한다. 왜 엄마한테 바로 이야기 못하고 모른다고 한건, 말하기 어려워서 그런거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단다. 자기 생각에 엄마가 하면 안된다고 하는 일일 것 같았던 거 같다. 나도 생각해보면 언젠가 앞머리를 바짝 당겨 눈썹 위로 잘랐던 일이 있었던 거 같다. 자르고 나서 머리가 짤뚱하게 올라갔던 기억도 나고. 다만 그래서 울었는지 뭘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때 나도 몰래 했던 것 같은 기억만 어렴풋이 날 뿐. 아이가 잘못된 일이라도 나에게 언제고 솔직히 이야기해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제 오늘 옌스가 취미활동을 하는 시간동안 이것저것 하나가 좋아할법한 일들을 하면서 여자들끼리 데이트를 많이 했다. “하나랑 같이 이렇게 데이트하니까 너무 hyggelig하고 좋다.”라는 내 말에, “자기도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신나하는 모습에 나도 마음이 간질간질 따뜻했다. 엄마를 말이라면서 이름이 sommer에 성이 bacon이라고 작명도 해주고, 자기 수레를 끌으라고 이랴이랴 채찍질에 당근도 주고 하면서 그 큰 민속촌을 쏘다녔는데, 나이 든 엄마지만 그나마 이런 걸 해줄 수 있는 체력이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나도 덕분에 즐겁게 구경도 하고 놀다 왔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또 이 나라의 학제도 덕분에 배우면서 학창생활이 어땠는지 되감아 가면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 초등학교 학창 시절 생각하면 3학년과 6학년의 담임선생님이 기억나는데, 특히 3학년때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쉬는시간에 선생님이 우리랑 놀아주시던 기억이다. 성함도 기억나지 않는데, 전두환씨처럼 머리가 벗겨지셨지만 또 얼굴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이들지 않았던 선생님이었는데, 연배가 어떠셨는지 모르겠다. 그 선생님이 자기는 기마자세로 단단히 자세를 잡고 서서 옆에서 순서대로 달려오는 애들 배를 잡고 일종의 공중제비를 돌릴 수 있게 해서 반대편 옆쪽으로 다시 뛰어가게 세워주시는 놀이였다. 많은 애들이 했는지, 아니면 내가 해달라고 해서 해주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기억이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나는 선생님과 어떤 관계를 쌓고 커갈지 궁금하고, 그걸 옆에서 간접적이나마 겪고 볼 걸 생각하니 설레기도 한다.

애를 키우면서 체력적으로 힘든 시기는 다 지나고 나니 애를 키우며 내가 겪는 많은 일들과 배움이 인생을 새롭게 채워주는구나 싶어서 이런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해주는 아이에게, 그 시간을 같이 행복하게 나누고 채워가주는 옌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부모에게서 받는 것과 또 다른 차원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눠주는 아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이가 진정 스승이구나 싶은 순간

네돌이 불과 한달정도밖에 남지 않은 요즘, 하나가 부쩍 컸음을 새삼 느낀다.

얼마전에 하나가 볼일을 본다고 화장실을 가더니 뭔가 놀라거나 당황했을 때 낼 법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부엌에서 저녁식사 재료를 손질하며 손에 물을 뭍히고 있었고 옌스는 거실에서 재택근무의 연장을 하고 있었기에 조금 더 손쉽게 갈 수 있는 옌스가 하나에게 달려갔다. 갑자기 애가 화를 내는 비명 소리를 지르고 발로 바닥을 구르고 아빠에게 성을 내길래 나도 손의 물기를 닦고 화장실로 나섰더랬다.

“무슨 일이 생긴거예요?”

하나는 엄청 서럽게 울면서 아빠가 속옷을 들춰 엉덩이를 봤다며, 유치원에서도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미안하다면서 바지에 혹시 오줌 싼건가 놀래서 본 거라고 양해받을 만한 일인 것처럼 가벼이 넘겼는데, 애 마음은 아닌 거였다. ‘아… 애가 이제 사생활의 영역에 대한 개념이 생겼구나… 엄마나 아빠가 아직도 큰 일 보고나면 엉덩이를 닦아주니까 그런 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자기가 허락하지 않은 타이밍에서의 신체에 대한 사생활을 이제 존중해 줘야 하는 거구나… 우리가 미처 생각을 못했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빠가 엉덩이를 봐서 하나가 속이 상했어요?”

“오줌 쌌다해도 유치원에서는 속옷을 열어보고 엉덩이를 확인하지 않는단말이예요! 그렇게 하는 거 아니랬어요!

기저귀를 뗀 이후에 유치원에서 바지에 오줌을 싼 일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마 유치원에서는 욕실에 데리고 가서 씻기기 전까진 오줌을 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바지 뒷춤을 들춰보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자기 신체 부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교육하는 모양이다.

얼른 아이를 안아주고 아이에게 아빠가 잘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엄마와 아빠가 세심하지 못했다며 속상한 마음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볼일 다 본 후에 손 씻고 아빠한테 가서 아빠가 잘못한 거고 사과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라고 했다.

이날 저녁, 양치질을 하기 전에 꼭 뻔히 보이는 숨바꼭질을 즐기는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꼭 자기 침대에 이불 덮고 숨는 하나. 숨바꼭질에서 우리가 못찾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이 루틴을 즐기는 거다. 아빠랑 하나가 만든 루틴에 나도 하나의 요구로 동참하게 되서 나는 나식대로 숨바꼭질 술래 역할을 했다. 이불 아래 숨은 하나를 발부터 찾아서 킁킁 냄새를 맡은 후에 “이 쉰내나는 발가락은 하나 발가락인데!”하면서 “하나 맞구나!” 하고 찾아냈었더랬다.

덴마크에 얼레리 꼴레리에 해당하는 “Øv, bøv, bussemand, sure tæer i saftevand”이란 노래가 있다. “얼레리 꼴레리, 코딱지, 주스에 담근 쉰내나는 발가락” 이런 내용인데, 여름에 간혹 하나 발에서 쉰내가 날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발을 씻어주면서 가볍게 놀린 일이 있었다. 이후에도 발에 쉰내가 나지 않아도 몇번 그걸로 놀린 적이 있었는데, 사실 하나 발에 쉰내가 계속 나면 그걸로 안놀렸을텐데, 쉰내가 안나니까 놀렸던거다. 그런데 그게 속상했나보다. 애들이 유치원에서 금요일마다 따돌림 방지 교육을 받는데, 거기서 받은 교육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간 쌓여온 게 어제 터진 모양이다.

“발가락에 냄새 나는 것만으로 그게 저인 걸 맞출 수는 없는 거예요. 발가락에 냄새 나는 사람이 저만 있는게 아닌데, 발가락에 냄새 난다고 그게 어떻게 저인지 아는 거예요? 그리고 발가락에 냄새가 나는 걸로 자꾸 놀리면 안돼요! 같은 걸로 자꾸 놀리면 안된다고 했어요!”

아차…

“미안해요. 엄마가 하나 발가락에서 냄새가 안나니까 그렇게 놀려도 놀리는 거라 생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엄마 착각이었네. 진짜 놀린 거는 아니예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렇게 안할게요. 미안해요.”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아닌 것으로 놀리는 것이든 맞는 것으로 놀리는 것이든, 상대가 아주 재미있다며 유쾌하게 웃고 있어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게 남을 수 있다는 건 나도 경험한 바 있는데, 상대가 아이라고 해서 그냥 재미있게 받아들일 거라 착각했었다. 그리고 뭐가 되었든 반복적으로 놀리는 건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오늘, 하나가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면서 엄청 우렁찬 소리로 힘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감자튀김 똥이 나온다면서 (이건 도대체 어떤 똥인지..?) 힘을 또 끙차하고 주는데 나랑 옌스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동시에 키득 거렸다. 그러자 하나가 묻는다.

“왜 웃는 거예요?”

우리가 그냥 웃는 거라고 답을 하자

“제가 낸 소리 때문에 웃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웃으면 안되는 거예요!”

라고 훈계를 한다.

“아.. 비웃은 건 아니고, 너무 재미있어서 웃은 거예요! 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안웃을게요!”

라고 답을 하자

“그렇게 성의없이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면 안돼요! 미안할 일을 만들지 않게 기억을 하고 미안할 일을 하지 말아야죠!”

라고 쏘아 붙이는데, 할 말이 없더라. 내가 한 말을 고대로 나에게 되돌려주고 있더라. 아… 반성해야지 싶었다. 그래서 옌스랑 우리 좀 주의해야겠다고 나지막히 대화를 나누는데, 하나가 화장실 문을 탁 닫더라. 그래. 너도 화장실 문을 닫는 법도 배워야지…

아무튼 애가 어리다고 애 다루듯 대하면 안되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해야할 에피소드가 많았던 지난 이틀이었다. 참 많이 컸구나. 대견하고, 뿌듯하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나를 사랑하는 아이, 내가 사랑하는 아이

원래도 애정표현이 많은 아이었지만 요즘 부쩍이나 사랑한다거나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세살 반만 지나면 정말 사람이 되서 육아가 쉬워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요즘 들어서 그 말이 부쩍 와 닿는다. 애하고 크게 씨름할 일도 없고 애가 짜증을 내는 타이밍에도 쉽게 진정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밤에 악몽을 꾸더라도 그걸 현실과 구분을 해서 말로 차분하게 애를 진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오랫만에 신생아때부터 사진을 찬찬히 둘러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힘든 건 거의 다 잊혀지고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 옌스가 마흔 일곱에 나도 마흔인지라 이제와서 둘째를 낳을 생각은 없지만, 왜 사람들이 그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낳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맞은편 집 윗집에서 딸아이를 낳았는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얼마나 설레고 이쁘던지. 그 당시의 기쁨과 체력적 피로에서 오는 애환이 동시에 기억나서 부모들의 다채로울 감정을 미루어 짐작해보기만 한다. 하나는 지금도 냄새를 맡아보면 어른과 달리 좋은 냄새가 나는데 애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나에게 몸을 던져 파고들을 때면 이럴 시기도 얼마 안남았을 것 같아서 얼른 나도 살을 부벼가며 냄새를 흠뻑 맞곤 한다. 이렇게 나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아이를 돌보는 게 힘들어 했던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하나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더욱 더 힘껏 안아준다.

하나는 내게 가장 완벽한 아이이다.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그런 완벽한 아이. 요즘은 그래서 네가 나에게 심통이 나있을 때도, 나쁜 일을 했을 때도, 그래서 내가 혼을 내거나 화를 내게 되더라도 나는 너를 그대로 사랑한단다… 라고 자주 말해준다. 또 잘하는 걸 너무 당연시 생각하고 잘못하는 것만 훈육을 위해 지적하면 자기가 잘 하는게 없다고 내가 생각한다 오해할까 싶어 잘한 건 잘했다고 담백하게라도 칭찬해주려고 노력한다.

밤에 잠든 얼굴을 보면 많이 없어진 것 같은 아기때 얼굴이 아직도 보인다. 이 아이는 아마 내가 여든살이 되어도 나에겐 아기이겠지? 애 키우다보면 마음 철렁할 것 같은 아찔한 순간들이 간간히 생기는데, 그럴때마다 큰 사고 없이 나와 함께 인생을 나눌 수만 있으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건강하게 자라줘 하나야…

2020년 9월 12일

아이들은 참 다르구나.

친구와 잠깐 이야기를 했다. 그 집 아이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라 발달상 차이를 지켜보기에 좋고 신기한 점이 많다. 특히 그 차이에서 그런 점을 많이 느낀다.

그 아이는 수와 어떤 구조를 파악하고 구성하는 데 비상하고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 쪽으로 영재와 같은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에 대해 내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특별하다 생각하는 모습을 내비치니, 거기에 더해 창의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비치더라. 꽤나 큰 애들이 할 레고 조립을 거의 혼자서 다하는 수준인데, 레고에 동봉된 조립도면을 거의 외워내서 그걸 혼자 해내는건데, 뭔가 창의적으로 만드는 쪽으로 특별한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상자 밖에서 문제를 풀어내는 참신함 같은 것이 자기에게 부족해서 그런 걸 아이가 갖고 태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런 게 잘 안느껴진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하나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어떤 정해진 것 그대로 해야하는 것을 별로 안좋아하고, 장난감 대부분을 그 본연의 목적대로 갖고 노는 것보다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노는 걸 좋아한다. 놀이를 만드는 걸 잘해서 자기가 만든 놀이에 친구들을 참여시키는 것을 잘한다. 바꿔 말하면 남들이 참여하고 싶을만한 놀이도 잘 만든다는 거다. 손목 시계를 시계로만 쓰는 게 아니라, 도장이라 치고 여기저기 도장을 찍는 시늉을 한다던가, 도장을 갖고 도장이고만 쓰는게 아니라, 반창고라고 하고 놀이로 상처났다고 하는 곳에 꾹 눌러 반창고를 붙여주는 시늉을 한다. 펜은 막대아이스크림이고, 아이스크림 콘은 약통이다. 한 사물의 형태에서 다른 사물의 대상에서 뽑아낼 수 있는 특성을 발견하면 그걸 그 다른 사물이라 칭하고 노는 대에 능하다. 추상화 능력과 창의력이 탁월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니 정해진 도면을 따라 뭔가를 정교하게 만드는 건 하나가 잘 하는 일이 아닌거다. 좋아하지 않으니 잘할 수가 없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서 뚜렷한 특성들이 발견될 때,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유전적 요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어 놀랄 떄가 많다. 그리고 잘 하는 것과 부족한 것을 어떻게 키워줄 지,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아니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정말 부모가 생각하고 스스로를 교육해서 아이가 커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게 참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2020년 9월 9일

쉬웠다가 어려웠다가 하루하루를 종잡을 수가 없다.

요즘은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다르다. 하루는 너무나 쉬웠다가 다른 하루는 너무나 어려웠다가 종잡을 수가 없다. 머릿속에 새로이 들어가고 경험하는게 많아서 그런 걸까? 아직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이 능숙하지 않아서 뭔가 심사가 뒤틀리면 그날 하루가 어려워지는 걸까? 그렇기엔 또 기분이 좋은 날은 웬만한 일에도 쉽게쉽게 넘어간다.

추상적 개념에 대한 관심

죽음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겨울왕국을 본 이후부터다. 하나보다 나이가 많은 유치원 친구들이 하나에게 엘사를 소개시켜줬는지 세돌이 지난 때부터 겨울왕국 타령을 하더라. 그래서 보여준 겨울왕국. 주인공 엘사와 애나의 부모님이 배의 난파사고로 사망한 것을 만화에서는 초상화에 검은 베일을 드리우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이걸 하나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들의 부모님이 바다에 빠져 돌아가셨고, 더이상 엘사와 애나는 부모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는데,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어 땅에 묻히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은 우리 마음속에만 살아 숨쉰다고 설명해줬는데, 나와 옌스가 세상을 떠나 언젠가는 자기와 같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제 모든 생명체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개략적으로 이해했다. 이것이 하나가 이해한 첫 추상적 개념은 아닐 거다. 사랑이라는 개념도 피상적이나마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차이라하면 사랑은 우리와 자신과의 교감을 통해 연결시킬만한 경험고리가 있다면, 죽음은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거라는 데 있다. 물론 겨울왕국이나 다른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고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 자기 상황에서 느낄 일은 없었으니까.

요즘은 진실과 과제에 대한 개념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자기의 미니 욕조 안에서 얼굴이 그려진 낚시채를 엘사로 정의하고 엘사가 엄마, 아빠를 찾아 헤메는 거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엘사, 너희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더이상 부모님을 만날 수 없어.”라고 이야기를 해줬더니, 하나가 냉큼 나를 저지한다. ”엘사는 진실을 알면 안돼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알면 안돼요!”라는 거다. 진실? 어디서 배운 표현이지? 집에서 쓴 적은 없으니 당연히 유치원에서 배운 표현이겠지만, 어떤 맥락에서 배운 걸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까, 알면 안되는 일이라는 거다. 아… 숨겨진 진실은 파고드는 게 좋지 않다는 맥락에서 배운 거구나. 도대체 유치원에서 어떤 상황에 그런 표현을 들었을까? 남편은 진실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적이 없다는데. 특히 그런 맥락에서는.

아이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는 머리를 열어서 확인할 수도 없고, 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궁금하고 또 궁금하구나. 말속에 은연중 드러나는 흔적으로 그 머리속을 곁가지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2020년 8월 30일

두발자전거를 온전히 타기 시작하다

내 생일 즈음에 하나에게 페달이 달린 두발자전거를 선물했다. 그게 두달 조금 지난 일이다. 하나는 두돌때부터 페달이 달리지 않은 두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이걸 타고는 내가 빠르게 뛰지 않으면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빠르게, 급회전도 하면서 능숙하게 탄지 벌써 몇달이 된 시점이었다.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자전거 중 가장 작은 것을 샀는데, 아이들 자전거는 아주 특별하게 비싼 게 아니면 아이 체중 대비 정말 무거운 것들 밖에 없었다. 애가 금방 자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 비싼 걸 사기는 어려워서 그냥 살만한 범위 내 자전거에서 가볍고 조금 비싼 걸 골랐다. 그래도 9킬로그램이 조금 넘더라. 내 자전거가 스포츠 자전거로 개중 가벼운 것임을 감안하더라도50킬로그램대의 내 체중에 자전거10킬로그램인 걸 생각하면, 아이 15킬로의 몸무게에 9킬로는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그냥 복잡한 계산 없이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런 자전거를 아이가 처음에 타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미 자유로이 빨리 탈 수 있는 발자전거가 있는데, 어떻게 타야할 지도 잘 모르겠고 힘든 페달자전거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본인이 그렇게 원하던 분홍색 자전거였음에도.

그래도 옌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 타보겠냐고 물어보고, 옆으로 허리를 구부정하게 기울여 하나 자전거를 뒤에서 밀며 뛰어다니는 수고를 여러번 거듭한 탓에 8월 중반에 들어 거의 매일 하나가 자전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주변을 관찰해보더니, 큰 애들은 페달자전거를 타고 작은 애들이나 발자전거를 탄다, 이런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자기도 큰 애가 되어가고 있으니 자전거를 탈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자전거가 무거운데다가 발이 땅에 적당히 닿을 정도로 안장을 낮게 설치했더니 페달질이 힘들어서 그런지, 옌스가 밀어주면 자기는 균형만 잡으며 크루징을 하고, 페달은 발판 정도로만 썼었다. 옌스가 손으로 페달을 돌리는 걸 여러번 도와주고 나니 서서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가장 어려워하던 스타트는 약간의 내리막 비탈길에서 모멘텀을 활용한 연습을 반복하더니 어느새 요령을 터득해 평지출발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온 가족이 해안도로로 나가 하나의 자전거 투어를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함께하기로 했다. 결론은 대성공이었다. 우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인라인스케이트 도로에서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가 리드를 함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었고, 하나도 넘어짐 없이 우리의 신호에 따라 정지와 출발을 반복하며 완주해줬기 때문이다. 어느새 배가 고파진 하나가 찡찡거리긴 했지만, 주차장에 위치한 아이스크림집을 미끼로 써서 완주에 성공했다. 제법 긴 거리긴 했지만, 유치원에서 긴 소풍을 가면 길게는 8-9킬로미터도 너끈히 걸어내는 아이인지라 큰 무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와 온가족이 함께 체육활동을 한 건 처음이라서 의미가 큰 하루였다. 통상, 우리가 하는 체육활동은 하나가 제대로 참여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옌스가 줄을 타거나 외발자전거 연습을 하면, 내가 그동안 하나와 그 인근에서 다른 걸 하다가 교대를 해왔는데, 이번엔 모두가 동시에 같은 경험을 나누었으니까. 새로운 시대가 열린 기분이다. 아이와 취미를 나누는 시대. 뭔가 꿈꾸는 이야기 같구나.

2020년 8월 28일

사회적 욕구가 강한 아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상당히 힘들게 시작했다.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드러눕고 왁왁 거리며 울고 성질을 내는데 마음의 평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똑바로 행동하지 않고 그렇게 성질을 부리면 엄마는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다. 엄마가 화가 날 대로 난 것을 눈치챈 아이는 그제서야 자기는 엄마와 이야기 하고 싶다며 울고 백기를 들었다. 사과할 준비가 되었냐니까 죄송하다며 옷도 갈아입고 머리 빗겨달라고 거울 앞에 가서 앉았다. 애써 화난 감정은 추스르고 이야기를 하는데, 애가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 감정의 앙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건 아닌지라 딱딱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막상 집 문만 나서면 유치원을 가는 길은 매우 쉽다. 데려다 주는 건 주로 남편이 하는 일인데, 남편도 문을 나서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문을 나서면 그다음엔 쉽다고 했다. 유치원에 들어가서도 나를 한 번 포옹해주고 뽀뽀 한 번 하고 나면 손쉽게 헤어짐을 받아들인다. 어떤 날은 창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쏜살같이 자기 반으로 들어가 친구들과 놀기도 한다. 친구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유치원에 가는 걸 싫어한 적이 한 번 없고, 삼주간의 여름휴가 기간 중에는 친구들을 너무나 그리워해서 중간에 플레이데이트를 꼭 해야할 만큼 친구와 노는 걸 너무나 좋아한다.

친구 사귀는 것도 좋아하는데, 말의 호흡이 잘 맞아 대화가 통하고, 보육원/유치원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치는 사회적 규칙을 잘 지키는 아이라면 누구와도 잘 노는 편이다. 뛰고 넘어다니고, 기어오르고, 매달리는 식으로 노는 것도 좋아하고, 상상력을 활용해서 놀거나, 역할 놀이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친구와 케미가 맞지 않을 경우 혼자 떨어져서 일인 다역으로 대화를 하며 놀기도 하지만, 역시 친구와 함께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오늘은 남편이 차고 앞 공터에서 외발자전거를 타며 클럽저글링을 연습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자기도 한번 타볼 수 있냐며 말을 걸어왔다. 개중 쉬운 외발자전거 한개를 그에게 내어주어 타보게끔 해줬는데, 그 전에 타본 적 있다는 그니는 두어번의 시도 끝에 다칠까봐 몸을 사리며 그만 타겠다고 하더라. 그 와중에 하나는 두발 자전거를 혼자서 온전히 탈 수 있게 되었고, 그 행인의 주변으로 자전거를 요리조리 타는 거다. 예전같으면 이름부터 다짜고짜 물어봤을 것 같은데, 요즘 크면서 예전보다는 (아주 조금이지만) 수줍음을 타는 탓인지, 이름은 물어보지 않고 대화만 하고 자전거를 타며 자랑을 하더라.

그 행인도 자기 갈 길을 가고 나도 하나와 장을 보러 동네 수퍼에 갔는데, 가는 길에 그 행인에 대해 하나가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봤다. 왜 그 사람은 아빠의 외발자전거를 타 본 건지, 아빠만큼 잘 못타는지, 어디 사는지, 이름은 뭔지 등등. 직접 물어보지 그랬냐고 했더니 잊어버렸단다. 이말을 믿지는 않는다. 그렇게 궁금한 것을 쌓아뒀다가 나에게 물어보는 자체가, 잊어버렸다는 말과 앞뒤가 안맞지 않은가? 이유는 불문하고, 나도 모르겠고,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면 꼭 물어보자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수퍼에 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얼른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라 했더니, 아이는 쌓아뒀던 질문을 던지고, 자기가 엄마랑 쇼핑하러 왔음도 이야기하고, 그사람은 거기에 왜 왔는지, 뭘 사러 왔는지 이것저것 묻고 대화를 나누더라.

사실 하나가 길에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과 시시콜콜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나도 동네 길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예상치 못하게 대화도 많이 하고 이름도 기억하게 되는 등 과거에 안했을 경험을 하게 된다. 아이가 어른, 아이, 동물 가리지 않고 사회적 교류를 하는 것을 유독 좋아해서 말이다. 굳이 사회성을 두고 보자면 옌스보다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사회적이었는데, 나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다. 어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많이 나눠서 그런가? 표정도 그렇고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상대의 이름을 자주 부르기도 하는 등 내가 일부러 배우려 해온 테크닉들을 이 아이는 타고난 거 같아서 탄복을 하게 된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 다른 곳에 있지만 이 아이에게 있는 재능에는 사회성이 있구나 싶다. 아이를 보며 배운다는 말이 나는 아이의 실수를 통해 어른도 배운다는 뜻인 줄 알았더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말 애를 통해 내가 배울 일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2020년 8월 27일

하기 싫다고 거부하는 일을 강제로 시키기

간혹 심하게 떼를 쓰는 날이 있다. 평균적으로 보자면 떼를 크게 쓰는 애는 아니지만, 떼를 쓴다고 하면 정말이지 너무 힘이 좋아서 다루기 힘들지경이다. 오늘 플레이데이트가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아이의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놀다 왔다. 볼로네즈 파스타를 한껏 먹었다고 하는 걸로 보아 평소보다도 많이 먹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집 부모들과 잠시 담소를 나눈 후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이미 피곤해서 그런지 신발을 신는 타이밍부터 뭐하나 작은 거라도 자기가 원하는 바에서 틀어지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오늘 유치원에서 야외활동을 하느라 걷기도 많이 했을 거고, 새로운 집에 가서 노느라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자극도 많았을 거다. 지금 나는 애의 훈육에 감정을 보다 배제하고자 의식적으로 더 노력하고 있는 터라, 그냥 그렇게 행동하면 안된다고 조용히 설명하고, 내가 해야할 일에만 초점을 맞춰 애를 안아 들고 차에 태워 집에 왔다.

뭘 하더라도 삐딱선을 타는게, 차에서 내려야 되는 데 카시트에서 내리지 않고 자겠다고 하고,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둥 이미 집 안에서 전쟁을 한바탕 할 것 같은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조가 보였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가서 손 씻는 일이 전쟁이었다. 손을 안씻겠다고 베란다에 쳐둔 자기 텐트로 쏙 들어가버렸다. 남편이 손부터 씻으라고 여러번 이야기했는데도 따르지 않자, 애를 들쳐없고 화장실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 목욕은 안시키더라도 세수 시키고, 엉덩이, 손은 씻겨야 해서 옷을 벗겨야 하는데, 절대 협조하지 않겠다며 목욕탕 바닥에 드러눕는거다. 나는 올바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면서.

이제 우리도 한두번 한 일이 아니니 이력이 나지 않았겠는가? 내가 몸통을 딱 잡고 남편이 손과 얼굴을 씻기고, 남편이 양다리 부여잡고 내가 몸통을 잡고 엉덩이를 씻기고 몸에 물을 타올로 말렸다. 귀를 뚫고 갈 것 같은 날짐승의 포효같은 목소리로 자기가 씻겠다고 하는데 – 진작에 씻지, 다 씻기고 난 후에 또 이렇게 청개구리 짓을 한다. – 그걸 받아주면 또 난리칠 게 불 보듯 훤해서 방으로 들쳐없고 갔다.

의외로 얌전히 속옷은 입었지만, 잠옷은 안입겠다고 또 반기를 들기에, 그 옷 입기 싫으면 그냥 누구 주겠다고 경고했다. 진짜 안 입으면 누구 줄 생각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옷인데, 그렇게 남 주고 나면 자기 손해지. 역시나 얼른 잠옷을 입었는데, 아직 분이 하늘 끝까지 뻗쳐서 식지가 않는 거다. 들짐승이 내는 으르릉 소리로 같은 소리를 음절 사이사이 끼워 넣으며 ”엄 으르렁 마 으르렁. 제 으르렁 손 으르렁 제 으르렁 가 으르렁… (엄마. 제 손 제가 다시 닦을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는데 남편이나 나는 너무 어이도 없고 뭐가 그렇게 분할까 싶어서 너털웃음이 나왔다. 나도 안다. 아직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작은 일에도 이런 말도 안되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냥 그 머리속과 가슴속에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돌고 있는 건지 이해하고 싶어도 상상할 수가 없어서 우스운 것 뿐이었다.

마지막 관문인 양치질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자기도 알기 때문이다. 강제로 양치질을 하는 게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님을. 힘은 힘대로 썼는데 피할 수도 없고, 우리도 우악스럽게 힘을 써서 아이의 턱을 붙들어야 하니 턱도 아플 게 틀림없다. 대부분 10초 안에 굴복하고 입을 열었지만, 그 저항을 참 많이도 했었으니 우리나 애나 이골이 난 전쟁이다. 그래서 더이상 양치질은 큰 관문이 아니게 된 것 같다.

세살 반.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아직 훨씬 많은 나이. 해야하는 것은 해야하고, 해서 안되는 것은 하면 안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면 안될 게 많고… 그런 아이를 대상으로 우리는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우리의 역할을 다하는 건데,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크고 작은 전투를 많이 치르면서 마음 속 갈등도 정말 많이 겪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지? 그런 갈등. 때로는 유치원 선생님의 조언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육아서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부정적 인센티브를 결부시킨 훈육 – 예를 들어, 이렇게 행동하면 네가 원하는 일들을 해 줄 수 없다든가, 재우러 들어갔는데 애가 자지 않을 때 지금 잠자리에 누워서 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마가 그냥 나가겠다는 것과 같은 부정적 인센티브 설계 – 를 어떻게 배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있다.

나와 씨름을 해서 그런지, 오늘은 아빠가 재워주는 날이었는데도 꼭 엄마를 옆에 두겠다고 주장하여 우리 가족 셋 다 하나 방에 누워서 남편이 읽어주는 책을 들었다. 어른 둘이 누워 자리도 없는 매트리스에 엄마랑 같이 있겠다고 내 몸 위에 자기 몸을 겹쳐누웠는데, 솔직히 너무 무거웠다. 그래도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씨름을 한 뒤에 애와 살을 부비고 누우니 너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재워도 되는데, 자기가 덴마크어로 책을 읽어줘야하는 날이라며 우기는 남편을 보며, 남편도 참 많이 바뀌었다 싶었다. 애가 어릴 때는 지금과 같은 수준의 감정교류가 어려웠던 탓에 내가 대신 애를 재우겠다 하면 냉큼 좋다고 바꾸고 나갔을 남편이었는데, 지금은 아이 재우는 게 너무 좋고, 중요해서 바꿔주지 않겠다니. 아무튼 그렇게 애는 잠이 들었다. 너무 피곤한 탓인지 7시 반에 재우러 들어가 9시 반이 되서야 잠이 들었다. 내일 고생하겠네. 오늘은 우리도 일찍 자야할 것 같다. 내일의 전투에 준비태세를 갖추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