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내가 참 차가운 사람이다 싶은 때가 있다. 감정이 완전 메마른 건 아니지만 머리가 감정에 앞서기도 하고. 사실 그 덕에 크게 누구와 다투거나 하지 않는 것 같다. 옌스를 만나고 사랑하고 또 잘 다툴 일이 없는 건 둘이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옌스가 나와 반대의 사람이었으면 나는 정말 힘들었을 거고, 내가 현재의 나와 반대의 사람이었으면 옌스가 나를 견디지 못했을 거다. 감정이 상한 일이 있었으면 곰곰히 앉아 생각을 해보고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내 감정을 전달하고 내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범위 안에서 상황을 바꿀 만한 방법을 제시하고 해결하니 소리 높여 다툴 일이 없다.
그런데 삶은 나와 닮은 사람과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저런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내 이야기에 서운해할만한 사람들이 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줬으면 하는 바램에서 하는 푸념을 들을 때라던가, 내가 생각하기엔 합당하지 않은 일인데 동의를 구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라던가. 원하는 답을 해주기가 너무 어렵다.
사실 내가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닌데,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참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나이가 들며 외양도 달라지지만, 그보다는 내 알맹이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문득 드는 생각은, 해외생활이 나를 바꾼 것 같다. 혹시 내 깊숙한 속에 내밀하게 힘들어하는 나를 내가 숨겨두고 있는건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적응의 시기도 많이 지나고 더이상 그렇게 힘든 것 같지는 않다.
누가 잘해야만 한다고 한 건 아니지만 그간 시키지 않아도 한국에서 살아온 방식은 여기에 산다고 변하지 않기에 뭘 해도 그냥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잘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내가 정말 독립된 존재로 강인하게 살지 않으면 내 삶이 힘들어지니 최대한 빨리 홀로 서기할 수 있게 언어도 배우고, 학업도 열심히 하고, 체력도 기르려 한다. 뭘 하더라도 남편도움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한 상의는 해도 실제 서류작업을 하거나 행정처리나 금융거래를 하든 사전을 찾든, 구글 번역기를 돌리든, 법전을 읽고 공문서를 읽어내서라도 다 직접 했다. 간혹은 남편에게 이민자로서 이렇게 뭘 하나 하려해도 다 어려운게 너무 힘들다고 푸념하기도 했지만 결국 언젠가는 내가 다 배워야 할 일이니 하겠다고 나서서 다 했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그런 걸 다 빨리 잘해내는게 부럽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면 부럽거나 할 일이 전혀 아니고 그냥 열심히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해줄 수 밖에. 결국은 공감이 참 결여된 응답이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남들도 이렇게 해야하는 게 아닌데, 타인의 힘듦에 대한 하소연이나 고민을 들을 때면 내가 너무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답을 한 것 같다. 나도 십년전의 나였으면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했을텐데. 좀 더 공감하고 이해해주지 못하는 내가 아쉽다. 물론 공감 잘 못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바뀐 건 아니라 그건 내 본성이려니 싶지만… 내가 딱히 차가운 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아닌데 조금 그런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해서 아쉬운 거다. 아기가 태어나고 내 모성애를 자극해주면 바뀔까? 아기가 태어난다고 내가 엄청 바뀔 것 같지는 않은데.
인생사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한켠으로 차가운 면을 가진 나를 받아주는 사람들하고 만이라도 잘 살아봐야지. 모두에게 사랑을 받으려하는게 아니라 미움받지 않으려는 것도 다 욕심이다.
언니 이 댓글 보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언니의 차가운 단면에 반했어요..엥? ㅎㅎㅎㅎㅎㅎㅎㅎㅎ저 덴마크 간지 얼마안돼서 처음 뵙고 커피마시던날 제가 대사관 인턴공고 올라왔던거때문에 막 푸념을 늘어놓았던거 기억하시려나요?ㅎㅎㅎ그때 제가 그 공고 디테일도 없고 최소한 무슨일을 하는지는 알려줘야하는거 아니냐고 막 하소연했더니 언니가 차분하게 검색도 해보고 다른 대사관에서 같은 잡으로 올린 공고도 한번 찾아보고 지원하면 되겠다고 말씀해주셨었어요. 사실 처음엔 아..이반응을 바란게 아닌데..싶었다가 집에와서 생각해보니까 다 맞는말이더라고요. 그래서 지원도하고 면접도 봤었네요! 아쉽게 떨어졌지만요 😉
그때 만약 언니가 제 푸념에 공감만 해주시고 그냥 넘어갔더라면 아마 저는 불만만 갖고 지원은 안해봤을 것 같아요. 그럼 면접이란걸 볼 기회도, 대사관에 한번 가볼 기회도 없었겠죠.흐흐 ㅎㅎㅎ
그냥 그날 얘기했던 수많은 수다 주제중에 하나여서 기억 못하실 것 같지만 그냥..이성적인(혹은 차가운) 성격을 아쉬워만 하지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언니의 이성적인 어떤 생각들이 제게는 너무 소중한 조언이 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분명 그럴테니까요. 저 한국 들어오기전에 제 진로에 대해서 하소연했을때 언니가 말씀해주신것도 제가 요즘 한국에서 내리는 작은 선택 하나하나마다 떠올리는 자극제가 되었답니닷!
출산 얼마 안남으셨죠? 건강하게 순산하시길! 응원합니다 🙂
🙂 수민씨 댓글 읽고나서 처음 카페에서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인게 기억이 났어요. ㅎㅎ 맞아요. 막 힘든 걸 공감해주고 맞장구 쳐주는게 아니라 그럴 땐 이렇게 해보는 거 어떠냐고 이야기했었죠. 이게 제 성격이라 어떻게 크게 바꿀 수는 없겠지요. 수민씨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나의 이런 모습이 어떤 식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 조금 더 잘 알게 되었어요. 좋은 이야기 나눠줘서 고마워요~~ 한국에서 취업을 위한 면접 등으로 바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받고 하겠지만, 수민씨가 원하는 길로 가는 데 필요한 스텝들을 잘 밟아갈 수 있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할게요. 잘 할 거예요.
출산이 이제 5주 반 정도 남았어요~ 배도 산만해지고, 터질 것만 같지만 (앞으로 ㅋㅋㅋ) 지금까지 별 큰 문제없이 잘 지내온 만큼 마지막까지 그렇게 쭉 이어가면 좋겠어요. 응원의 기를 받아 순산해볼게요. 헤헤. 수민씨도 화이팅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