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첫 시험을 치르고

홀가분하다. 한 주 후에 다시 시작될 과목을 준비할 것을 생각하면 마냥 홀가분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주말만큼은 친구들과 와인을 앞에 두고 시끌벅적 떠들고, 한국에서 오는 가족들과 상봉도 하고, 산책도 하며 마냥 즐기리라.

시험 전날부터 서서히 시험에 대한 무게가 어깨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초조함. 시험기간이 되니 괜한 손톱만 괴롭히게된다. 오후 두시. 시험까지 23시간이 남았는데,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챕터가 남아있고 작년과 제작년 시험문제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제한된 시간 내 전체 이론을 충분히 숙지하고 시험을 볼 것이냐, 과년도 시험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할 것이냐로 고민을 하다가 이론 공부를 우선순위로 택했는데, 프로그램내 다른 학생들은 다들 과년도 시험문제를 푸는 것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면 불안함이 엄습한다. 과연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확신이 없기에. 그러나 그간 세번의 과제를 무리없이 제출했으니, 시험이라고 다를 바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불안함을 가능한한 멀리 밀쳐둔다.

오전부터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잠시 산책도 하고 장도 봐오자 싶어 밖으로 나왔다. 오전내내 자욱했던 안개는 사라지고 축축하리만치 이슬이 잔디에 잔뜩 내려앉았다. 조금 걷고나니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넓은 잔디에 사람은 없고 갈매기와 비둘기만 보인다. 바닷가라는 생각은 안하고 살지만, 사실 바다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라 나라 어디에서고 갈매기를 볼 수 있는데, 그게 아직까지도 나에겐 낯설고 신기하다. 아주 큰 갈매기는 거의 매같은 느낌이지만, 작은 갈매기는 다리도 가늘고 길쭉한 게 흰색 깃털로 빼입어 괜히 아는 채 하고 싶어진다.

우리 동네의 잔디밭은 매우 넓지만, 아파트로 잘 숨겨져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넓은 쪽으로 걸어들어갔는데, 역시나 나밖에 없어 방해받을 게 없는 기분이다. 아차. 내가 거기에 있는 새들에게는 방해꾼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이곳에선 가을부터 해가 아주 낮게 누워서 지나간다. 두시면 해가 눈을 향해 바로 들어와 석양 직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때문에 겨울엔 햇볕을 쬐도 추위에 큰 도움이 안되는 듯 하지만 그래도 그 빛깔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시험기간이라고 안에만 처박혀있었더니 낙엽이 많이 져버렸다. 부모님이 오시면 그 끝자락 남은 것 보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비바람이 남은 기간 남은 단풍을 다 쓸어가버리지 않기만을 빌어봤다. 덴마크에서 많이 보는 수종이 우리와 다른 것도 있고, 나이가 다르고, 가지치기를 하는 방식도 달라서 가로, 잔디밭, 숲에서 보는 상당수의 나무는 밑둥부터 아주 굵고 키가 아주 크거나 옆으로 넓게 퍼져있다. 그래서 잔디밭에 몇그루의 큰 나무가 낙엽을 소복히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녹색 위에 노랗고 빨간 빛깔이 켜켜이 내려앉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그리곤 한다.

30분의 산책동안 신발은 흠뻑 젖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나의 흥분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시험기간이라고 라면만 먹지 말고 좋은 음식도 먹어야 뇌도 활동하지, 시험 전엔 좋은 음식을 먹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동네 수퍼마켓에 들러 특가 할인하는 쇠고기 스테이크를 사갖고 돌아왔다.

마지막 챕터는 가장 최근에 배운 것이고 수업 중 잘 이해를 했으니, 목차만 읽어보고 나머지 시간동안은 과년도 문제를 훑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 시험세트당 4시간 분량이니 모두 샅샅이 보고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기로 했다. 저녁 9시, 더이상은 읽을 수가 없었다. 공부 더이상 못하겠다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자, 옌스는 어차피 지금 모르는 건 읽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거 없으니, 스스로 여태까지 해온 것을 믿고 푹 쉬라고 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없는 농으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고, 그 덕에 나는 마음 편히 공부를 접을 수 있었다.

시험 당일, 4시간 동안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야 하니 공부는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챕터 소제목과 정리노트를 눈으로 가볍게 훑어내린 후 모든 것을 덮었다. 오픈북 시험이니만큼 관련 자료를 바리바리 쌓긴 했지만, 4시간 동안 약 30문제를 과연 얼마나 자료를 보고 쓸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몇번은 아주 요긴하게 활용할 거란 생각에 소중하게 챙겨뒀다.

컴퓨터 시험인데, 내 디지털 펜이 시험시간 5분전에서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러 미리가서 다 세팅도 하고 준비했는데, 왜 펜 테스트는 안했지 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컴퓨터를 리부팅하고 펜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시험 폴더가 컴퓨터에 나타났다. 데이터와 배경 상황만 거의 반페이지가 넘는데, 난 반도 미처 못읽은 상황에 컴퓨터 타자소리가 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방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괜히 초조함만 가중되었다. 마침 갖고 온 귀마개가 생각나 이를 귀에 꼽고나니 소음이 가라앉으면서 마음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도 금방 시험에 몰입해들어갔다. 갖고 온 자료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가지 공식과 가정 등을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써먹었고, 내가 다 읽지 못한 챕터에서 많이 출제되었지만, 한문제 빼놓고는 무리없이 풀어냈다. 네시간 동안의 시험동안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문제를 푸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6시, 못풀었던 문제를 풀려고 하는 순간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닫힌다. 제출 버튼을 누르고 일어나니 각자의 얼굴에서 희비가 갈린다. 학생들 모두 나름의 기준과 기대를 갖고 오늘의 시험에 임했으리라. 누구는 통과만 하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고, 누구는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라며 본 사람도 있다. 어차피 성적이 앞날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점수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지만, 혹시나 나중에 공부를 더하려고 하면 성적도 중요하니 초조한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험 전날 마지막까지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실망스러움도 일면 들었으나, 그게 나인 것을 받아들여야지 어쩌나 하며 넘어갔다.

7시. 내가 제출했던 시험의 pdf 사본이 메일로 날아들었다. 어떻게 썼는지 읽어보려고 했지만, 집중도 되지 않아서 접어두었다. 혹여나 성적이 영 이상하면 그때 다시 열어나봐야지 하며 보관함으로 넘겨버렸다.

시험은 대충 잘 본 것 같다.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첫 스타트를 잘 끊어야겠다 싶어 더욱 열심히 했다. 혹여 결과야 어떻든 내가 그리 싫어했던 과목인 계량경제학을 스스로 만족할만큼 공부하고 이제는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매우 큰 수확을 했으니,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

오늘부터 주말은 (밀린 집안일 빼고)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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