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여왕의 75번째 생일
어제는 한국에서는 세월호 1주년 추모일이었지만, 덴마크에서는 덴마크 여왕의 75번째 생일이었다. 어느 하루가 누구에게는 애도할 날이되고 누구에게는 경축할 날이 된다는게 인생의 아이러니인 것 같다.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애도할 것은 애도하되,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이니… 이러한 가슴아픈 날이 다시금 없었으면 좋겠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같은 대형 사건 이후 이런 일은 설마 또 없겠지 했는데…
덴마크에서 생일은 어떤 의미일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컨셉은 없는 것 같다. 그냥 탄생 경축! 이런 의미인 듯 하다. 우리도 요즘은 거의 그렇게 바뀌었지만, 최소한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우기에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 꼭 들어있었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일반적으로는 Rounded Birthday라고 10년 단위의 순 개념을 크게 기념하고, 그 외에는 가볍게 가족끼리 식사하고 선물 주는 식으로 챙긴다. (역시나 애들은 제외… 항상 뻑적지근하게 하며, 우리와 달리 친구들만 초대하는 생일파티와 부모의 친구와 가족, 소수의 애들 친구를 초대한 생일파티 두번 정도 한다.) 그러나 여왕은 또 예외이다. 특히나 5년 단위로 조금 더 뻑적지근하게 하는 것 같다.
어제 덴마크어 수업 말미에 덴마크어 선생님 Jørgen(요언)이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D. 9. april 1940 blev Danmark besat af tyskerne. D. 16. april 1940 blev princesse Margrette født. Hun bliver i dag 75 år og vi holder meget af hende!” (1940년 4월 9일, 덴마크는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1940년 4월 16일, 마르그레테 공주가 태어났다. 오늘 그녀는 75세가 되고, 우리는 그녀를 매우 좋아하고 아낀다!)
덴마크인의 인식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평등주의를 생각하면, 왕실을 유지하는 자체와 여왕의 생일이라고 사람들이 국기(Dannebrog)를 걸고, 들고 흔들며 여왕에게 환호하는 모습 등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덴마크에 사는 외국인들이 참 아이러니 하다고 하는 부분인데, Jørgen은 바로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1940년 덴마크가 독일에게 점령당했을 때, 바로 몇일 이후 있었던 공주탄생은 우울한 덴마크인에게 기쁨을 가져다준 존재였으며, 지금과 왕실이 보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을 때 이러한 공주탄생은 행운의 상징같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장수하는 것에 대해 덴마크인은 기뻐하고, 75세가 된 것을 경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Jørgen은 자기가 여왕을 지키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라고 덧붙였다. 자기는 군대에 자원입대했다고. 그래서 네가 물었다. 뽑기에서 낮은 숫자를 뽑았냐고. 그랬더니 맞단다. 그래도 자기는 왕실근위대에 지원했다고 덧붙이면서.
덴마크 군대
덴마크 군대는 징집이 원칙이다. 만 18세가 된 덴마크의 모든 남성은 우선 징집 대상이다. 2014년 10월에 발간된 덴마크 징집위원회의 통계집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에는 대상자 18,216명 중 48.05%가 적합대상자이며, 2015년 1월 발표된 덴마크 국방부 인사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총 4,159명이 징집되었다. 이중 자원입대율이 2014년에 97%에 달한다는 충격적 사실! 또한 전체 복무자 중 여자가 매년 다르지만 10~2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 눈을 끈다.
정부 민원서비스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만 18세가 된 덴마크 남성은 국방의 날 행사에 소집을 명하는 편지를 받게된다. 이 날은 국방부와 국가재난재해 관리위원회와 교육 및 직무 기회에 대해 소개하고, 징집대상자의 복무적합도를 측정하는 날이다. 이는 덴마크 거주중인 모든 덴마크남성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여성의 경우에도 만 18세가 되면 국방의 날 행사에 참석할 수 있으며, 자원 입대 희망시 복무적합도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내하는 편지를 받게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징집 방식! 복무 적합이 판정된 징집대상자는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 번호는 1번부터 숫자가 나열이 되어 있고, 조커와 비슷한 자유숫자도 있다. 연간 징집인원수가 크게 변동하지 않기 떄문에, 4천~6천명 정도가 간다고 보면 된다. 낮은 숫자를 뽑을수록 징집확률이 높아진다. 1번은 무조건 가는 것이고, 8천번은 안가는 것이다. 그런데 4천~6천번에 해당하는 번호를 뽑은 사람은 내가 징집이 될지 아닐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운이 좋으면 안가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가는 것이다. (역시나, 대부분의 덴마크인도 군대는 안가고 싶어한다. 하하하.)
여기서 자원입대가 생긴다. 물론 그냥 자원입대를 신청하는 사람들도 꽤나 된다. 여성 복무자 모두는 자원입대자이니. 그러나 여기에선 정말 군대가고 싶어해서 가는 사람 말고, 의도치 않게 자원입대하는 사람을 이야기 해보자. 내가 갈지 안갈지 모르는 상황이든, 갈 것을 아는 상황이든 자원을 하면 배치에 있어서 자대배치에 있어서 입대자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준다고 한다. (물론 꼭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이렇니, 입대가 거의 확실하다 싶으면 그 해의 배치인원이 발표되어 자기의 입대여부가 결정되기 전에 그냥 자원을 하는 것이다. 최대한 안가고 싶으면, 애매한 숫자를 뽑아도 버티다가 징집되면 가고 아니면 안가려는 사람이 있어서 비자원 입대자 비율이 10%를 밑도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말 군대 가고 싶어서 가려는 자원입대자가 늘어난다고 한다.)
그전에는 평균 복무기간이 1년정도로 지금보다 길었는데, 요즘 일반 복무가 4개월에 불과하고, 경기병 연대만 12개월, 왕실요트 대네브로(Dannebrog, 덴마크 국기 이름)에 승선하는 부대와 국가재난재해 관리위원회는 9개월, 왕실 근위대는 8개월 복무한다. 우리보다 복무기간이 훨씬 짧기때문에 비자원입대자의 비율이 5% 미만으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대학교 진학이나 취업을 하기 전에 뭔가 다른 것을 하면서 진로를 고민하는 덴마크 학생들에게 군대가 꼭 불행한 옵션은 아니라고 한다.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기 때문에 선택을 하기도 한다고…
자원입대가 어쩌구 저쩌구 해고, 결국 덴마크 군대는 뽑기부터 하고 간다는 결론이다. 국방수요가 낮으니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놀라운 사실. 그러나 최근 러시아 비행기가 스웨덴과 덴마크 영공을 돌다가고, 러시아 잠수함이 스웨덴과 덴마크 인근 해역을 오고가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고, 크림반도의 불안정한 정정상태 등을 계기로 국방 규모와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그래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뽑기는 계속 유지되지 않을까 한다.